10.
객석 없음 (웹진 춤in / 비평)
교양 없고 산만하고 준비되지 않은 ‘비정상’ 관객에게는 원하는 공연을 원하는 극장에서 볼 권리가 없는가. 이는 휠체어 이용 장애인에게 출근 시간을 피해서 지하철을 타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정치인의 언술과 어떻게 다른가. 혹은 화상이나 부상의 위험을 들어 어린이를 금지하는 노키즈존과는 얼마나 닮았나. 극장은 금지나 통제가 아니라 보완을, 다른 접근을 시도해야 했던 것이 아닐까. 공연예술은 연약하고 다양한 인간 군상을 무대에 올리며 혼란하고 취약한 삶과 시스템을 드러내지만, 실제로도 나약하고 유난한 인간은 관객으로 초대하지 않는다.
12.
낮은 창문, 공사 판넬과 붉은 벽돌, 손과 떡, 고무통들, 다른 통과 겹쳐진 또 다른 통들, 물 속에 잠긴 쌀, 찹쌀, 쌀 가루, 누빔 조끼를 입은 등, 어깨들, 머리들, 낮은 의자, 플라스틱 의자, 비트와 비트들, 부딪히는 기계 소리, 궁금한 눈빛들, 들썩임들, 11시의 캔맥주, 진동, 헤드폰 속 오래된 멜로디.
우사단로2길 55. 보광떡방앗간을 목적지로 설정하고 택시를 부른다. 분명 서둘러 준비를 시작했음에도 출발하려고 보면 늘 공연에 늦을 것만 같은 불안이 밀려오고, 결국은 이렇게 택시 엔딩이다. 공연 장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 공연을 함께 보기로 한 아홉 살 딸의 입은 쉴 틈이 없다. 테크노가 뭔지, 떡을 함께 만드는 건지, 먹는 건지, 춤을 보는 건지 같이 추는 건지 묻는 질문의 연속. “테크노가 음악인데? 떡을 만들겠지…? 먹기도 하려나?… 춤을 추려나…?”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것밖에, 내겐 다른 도리가 없다. 우리는 커뮤니티 연극 <떡사랑사랑같이자유기념박수>을 보러 가는 중이다.
택시에서 내린 곳은 고요한 주말 아침의 골목길이다. 한쪽은 재개발을 위한 철거가 한창인, 다른 한편은 슈퍼마켓과 피아노 학원과 방앗간이 드문드문 자리한 주택가다. 방앗간으로 다가가 예매 확인을 하는 사이, 공연은 보기 싫다던 둘째(아홉 살 어린이 옆에 타고 있었고, 자신은 공연을 안 보고 아빠와 데이트를 할 거라고 주장하던 여섯 살 어린이)가 아무래도 낯선 ‘극장’ 풍경에 매력을 느꼈는지 누나와 공연을 보겠다고 밝힌다. 아니, 그건 네가 선택하는 게 아닌데? 공연팀에서 당연하지 않은 이 사태를 기꺼이 받아주어, 여섯 살 남자 어린이는 아홉 살 여자 어린이와 함께 관객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그즈음 방앗간 건물 2층에서 친숙하고도 남다른 기운이 느껴지는 노년의 여성이 딸과 함께 내려와 방앗간 안으로 들어갔다.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장인의 입장이었다. 곧 테크노의 그것이 분명한 비트 또한 방앗간 안에서 흘러나온다.
방앗간으로 들어가면 관객으로 온 우리들은 어쩐지 떡을 준비하는 장인의 뒤를 따라다니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따라다닐 만큼 넉넉한 공간은 아니었기에, 몸의 방향을 그를 따라 이쪽으로 저쪽으로 옮긴다. 그는 물에 잠긴 쌀, 낯선 기계와 익숙한 고무통 사이를 낭비 없이 오가며 테크노 비트 사이로 자부심 가득한 추임새를 넣는다. 최고의 쌀과 대량 주문의 역사와 신선도의 중요성에 대해 배운다. 창문을 넘어온 햇살이 쌀가루를 만드는 그의 등에 부서진다. 테크노는 모닝 캔맥주를 손에 든 청년과 사진을 찍어 대는 아홉 살 어린이 사이에서 진동한다. 관객들은 보이고 들리는 것 사이를 천천히 더듬거리며 몸을 들썩이고 떡을 만드는 손과 어깨를 들여다본다. 우리는 공연 전에 웹 링크 하나를 받았다. 휴대폰으로 각자가 포착한 사진을 그 웹사이트에 전송하면 방앗간 구석에 놓인 TV 모니터에 제각각 찍은 사진이 잇따라 떠오른다. 동시에 휴대폰에는 사진과 교환하듯 조각 글들이 떠오른다. 방앗간 안에서 그걸 제대로 읽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신 거칠게 훑어본 글의 단어들과 방앗간의 풍경, 관객의 뒷모습과 표정, 들뜸과 비트와 진동이 실시간으로 교차 편집된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조각 글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읽으라고 그리 쓰인 것이었을 테다.
그래서 말인데, 실시간 자체 편집의 이어 붙임 속에서 질문에 답을 할 차례였다. 그러니까 ‘떡’이랑 ‘테크노’가 무슨 상관일까? ‘사랑’은? ‘기념’은? ‘자유’나 ‘박수’는? 나는 어떤 실마리들을 휴대폰 위로 떠오르는 조각 글을 통해 서둘러 구출해냈다. 아무래도 낯선 것을 보면 냅다 두렵고 어려워 뒷걸음치게 되니까, 일단 빠르게 나만의 해석을 가해 통제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걸 관객으로서 일종의 관점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불러도 될까? 혹은 비평가로서 해석할 거리를 발견해내는 것으로, 혹은 창작진의 의도를 잘 파악하는 미덕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혹은 뭘 알아야 이 공연을 제대로 즐기는지 파악했다는 섣부른 계산이라고 보는 게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출해낸 실마리들은 귀를 울리는 비트와 떡 찌는 온기 사이에서 비틀거리며 사라졌다. 좀체 이 공연에 대해 알 수 없어진다. 리쾨르로부터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로 이어진 해석학의 역사에서 이 세계는 내게 보이는 것 이면에 숨은 뜻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보이는 게 전부인 줄 아는 무지한 대중에게 지성을 가진 이들은 그 뒷면을 마술사처럼 밝혀냈다. 나는 모르는, 그러나 오랫동안 이어져 온 이론적 토대에 근거한 사유와 의미를. 그런 게 멋져 보이는 학생이었던 나는 곧잘 마술사 흉내를 내곤 했다. 아, 그러니까, 이건 그런 거야… 이번에도 유혹은 있다. 그러니까 이 공연이 말하는 건 이런 거야, 그런 말로 시작되는 마술을 부리고 싶은. 주워 들은 이론가들의 이름과 낯설고 매혹적인 용어들을 주문처럼 외워 본다. 물론 흉내 내기는 실패로 끝난다. 여느 무능한 마술사의 마지막처럼 마술봉 끝에서는 장미꽃이 아니라 개구리가 나온다.
실패를 예방해준 것은 나의 여섯 살 어린이였다. 그는 테크노가 싫다. 떡도 싫다. 그는 꽤 멋진 힙합 공연을 보러 갔다가 맨 앞줄에서 귀를 막고 스태프에게 항의를 했던 어린이다. “악! 소리가 너무 커요!” 그는 깨설탕을 넣어 동그랗게 빚어 기름칠을 한 쑥송편만 먹는 어린이다. 곧 뜨끈하게 쪄질 백설기에는 그 어떤 호기심도 없다. 그는 내 손을 붙들고 공연 장소인 방앗간 바깥으로 나를 데리고 나섰다. 아니, 아들아, 너는…
12시를 향해 가는 대낮의 바깥은 밝았고 넓었고 시원했다. 밖에는 이 놀라운 방앗간 집의 딸이 작은 창문 너머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팔짱을 끼고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재밌어, 그런 표정을 하고. 나는 방앗간 집 딸과 골목에 서서 방앗간 건물과 옆집, 맞은편 골목의 재개발 속도와 떡집의 역사, 그것의 끝을 둘러싼 파편들을 두서없이 나눈다. 곧 떡을 찌는 동안 쏟아져 나올 뜨거운 김에 여섯 살 어린이가 다치지 않도록 주시하며 차를 마신다. 작은 창문 너머로 들썩이는 이들의 머리가 오밀조밀 보인다. 이것은 극장 로비에 설치된 어느 모니터도 가져본 적 없는 공연 실황 뷰. 나는 공연 중간에 객석에서 벗어나는 여러 이력을 가진 관객이다. 아이와 함께할 때면 언제든 자리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처음엔 그게 너무 억울하고 아쉬워서 아이를 다그치다가도, 객석으로 돌아간들 별 이득이 없으리란 걸 배운 관객이다. 어떤 거리극은 멀리서 봤고, 어떤 공연은 로비에서 들었다. 극장 로비에 설치된 공연 실황 모니터는 하나같이 얄궂은 데가 있어서 늘 서로 다른 이유로 못마땅했다. 한편 김이 오르는 그 좁은 창 너머로 들썩이는 머리들은 말하자면 뻔한 프로시니엄 액자 화면이 아니라, 이 공연만이 가진 또 다른 앵글이었다. 관객이 무엇을 봐야 할지 단정하지 않는 창작진은 관객 제각각의 앵글을 너그러이 인정했다.
그리고 떡이 나왔다. 하얀 백설기인데, 사이 사이로 검푸른 점들이 박힌 예쁜 떡. 예외 없이 여섯 살 어린이는 뜨끈하고 보드라운 떡을 받아 들고 외쳤다. “으악! 콩 싫어!” 사람들이 웃고, 나도 콩 싫어, 이거 콩 아니야 건포도야, 이거 건포도래, 건포도가 든 백설기는 처음 봐, 고맙습니다, 뜨겁다, 조심하세요, 맛있다, 북적댄다. 시끄러운 어린이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소란 사이로 쿵쿵 비트가 울린다. 떡과 테크노가 만드는 묘한 조화 속에서 어린이의 투정과 떡에 대한 예찬은 이븐하게 버무려진다. 모두들 그즈음 그 비트가 그냥 즐거운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라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테크노의 유래나 그것의 개척자, 혹은 베이퍼웨이브가 뭔지 좀체 알 수 없지만, 시간의 흐름이 쌀을 떡으로 만드는 동안 그 진동만이 공평하게 이 공간을 빈틈없이 채우고 창밖으로 넘쳤다는 걸 알아챈다. 신나거나 시끄러운 것은 무엇인가를 지키거나 감싸는 것이 된다.
그러니 떡과 테크노는 관련이 있는가. 모르겠다. 내가 아는 해석의 기술로 내 수준의 주문을 외우면 그 둘 사이에서는 그저 개구리가 나온다. 하지만 그것을 그냥 두면, 그 둘 사이에 무수한 고리들이 거미줄처럼, 아니 그보다는 불규칙하지만 느슨하게 슬며시 이어진다. 언덕길, 공사 판넬과 붉은 벽돌, 따뜻한 커피, 어린이들, 손과 떡, 짙은 주황색 고무통들, 다른 통과 겹쳐진 또 다른 통들, 물속에 잠긴 쌀, 찹쌀, 쌀가루, 누빔조끼를 입은 등, “몇 살이야?” 묻는 목소리, 어깨들, 머리들, 낮은 의자, 플라스틱 의자, 비트와 비트들, 부딪히는 기계 소리,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마다 멈춰진 장면, 말들, 글 조각들, 쪽글이 떠오른다. 아이와 맞잡은 손. 궁금한 눈빛들. 들썩임들. 11시의 캔맥주. 팔짱을 끼고 선 남자. 문을 열고 닫을 때의 끼익 소리, 비트, 진동, 헤드폰 속 오래된 멜로디. 내게 이 날은 긴 목록의 풍경으로 기록된다. 불현듯 떠오르고 까맣게 잊혔다가도 새로이 편집될 목록으로. 아홉 살 어린이의 일기에 이 날은 이렇게 기록되었다. “보광떡방앗간에서 공연을 봤다. 떡이 뜨겁고 맛있었다.” 그는 그의 방식으로 뜨겁고 맛있는 순간들을 기억한다. 이보다 더 나은 말을 찾기 어렵다는 사실을 이제는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