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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디와 그레코

“웬디, 웬디, 웬디!”

 

창 밖에서 그레코의 목소리가 들린다. 바람이 휙휙 불어온다. 창문을 덜컹임, 빗소리, 틈새로 새어드는 쉭쉭거림이 바람과 목소리가 모두 힘이 세다는 걸 알려준다. 웬디는 창가로 나가서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는 대신, 1층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레코는 현관에서 열쇠를 들고 있다. 우산은 접지도 않고 그대로 내팽개친 상태로 바닥에 펼쳐져 있다. 제 몸에 비해 너무 크고 검은 우산을 쓰고 온 게 틀림없다. 우산을 쓰고 바람이 거센 길을 걸을 때는 두 가지 가능성만 남겨진다. 하나는 바람을 거슬러 오느라 지쳐버리는 것, 다른 하나는 바람을 타고 오느라 긴장하는 것. 그레코는 후자로 보인다. 그는 긴장한 표정이다. 바람을 타고 왔기 때문일까, 손에 쥔 열쇠 때문일까.

 

웬디는 미신을 믿는 어린이지만, 자신만이 알고 있는 미신에 관해서는 털어놓지 않는다. 그레코는 반대다. 미신을 믿지 않지만, 자신만이 알고 있는 신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열쇠가 그 증거다. 웬디는 열쇠를 받아 들고 작은 손으로 쇠 냄새와 약간의 기름기가 감도는 것을 만지작거린다. 정말 괜찮겠어? 웬디는 그런 마음으로 그레코를 바라보지만, 그레코는 단호하게 코를 훔친다. 코에 기름기와 쇠 냄새가 묻는다. 그런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듯, 웬디의 손에서 열쇠를 다시 받아 든 그레코가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우산은? 웬디는 그레코가 내던져두었던 거대하고 검은 우산을 들고 뛰어가 그레코와 자신의 머리 위를 가린다. 천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둘의 하늘은 그저 둥글고 검다. 


 

“이거였어?”

 

웬디는 조금 시시하다는 듯이 그레코의 얼굴을 올려다 본다. 그레코는 벽에 기대어 선 채로 뭘 모른다는 눈과 입꼬리를 하고 있다. 웬디는 바닥에 앉아 있다. 빗물이 들어온 것도 아닌데 조금 축축한 바닥에는 신발 상자 크기의 나무 상자가 놓여있는데, 오른쪽 끝으로 자물쇠가 달려 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북서쪽으로 부는 오후 4시. 모든 게 완벽할 때 자물쇠를 열면, 그걸 연 사람은 자신의 미래의 한 장면을 볼 수 있어.”

 

그레코는 정말로 그렇게 말했다. 

 

“그레코, 너의 꿈은 의사라고 했잖아. 혹은, 과학자. 그런데, 그런 말도 안되는 걸 믿으라고? 내가 믿는 미신 중에 그런 건 없어. 난 안 믿어, 이런 거”

 

웬디는 그렇게 말했지만,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레코의 말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신을 믿지 않았다. 가능한 그의 열쇠가 진실이길 바랐다. 과학 따위 알 바 없으니까, 미래를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언제나 열쇠를 잃어버려서 우는 어린이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미래를 확인하고 싶었고, 울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는 걸 미리 알고 싶었다. 

 

*

 

사실 비밀의 열쇠를 구했다고 그레코가 쪽지를 남겼을 때, 웬디는 울고 있었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왕복 2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8살 어린이라면 스스로 집과 학교를 오갈 줄 알아야 하는 시대였다. 2023년이 되면 보호자 없이 걷는 8살 어린이를 볼 수 없으리란 걸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 그 시절 웬디는 집까지 혼자 걸어서 갔다. 아침에는 혼자 학교에 갔다.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 중에ㅡ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것만으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다면ㅡ 웬디와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는 없었다. 웬디는 학교에서 동남쪽 아래에 있는 수동Suedone이라는 마을에 살았는데, 학교의 정문은 북쪽에 나 있었고, 후문은 서쪽에 나 있었다. 북쪽으로는 거주지가 밀집한 곳이었고, 서쪽으로는 상가와 관공서가 있었다. 동남쪽은? 산이 있었다. 꽤 높은 산이었지만 골짜기를 따라서 넘으면 야트막한 길로 걸을 수 있었다. 웬디는 그 산 너머에 살았다. 수동에 사는 어린이도, 그 산에 사는 어린이도 없었으므로, 웬디는 매일 2시간은 혼자서 보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치자, 아이들은 우르르 북쪽 문으로 뛰어나갔다. 웬디는 천천시 서쪽 문으로 걸었다. 그나마 그 문이 뒷산으로 가기에 가까웠다. 학교 아이들은 뒷산이라고 부르는 그 산은, 웬디가 8년 동안 앞산이라 부르던 것이었다. 웬디는 매일 산을 부르는 호칭을 헷갈려하며 시간을 보냈다. 뒷산을 넘어 앞산을 지나 집으로 가네. 웬디는 그런 가사를 붙여 노래를 불렀다. 뒷산을 넘어 앞산을 지나 집으로 가네. 그리고 집에 도착해서야 알아버렸다. 열쇠.

 

맞다. 집 열쇠가 없다. 주머지를 뒤집어 까보고 가방을 모두 뒤집어 흔들어 보았지만, 열쇠는 없었다. 문득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는 도중에 딸려나온 열쇠가 의자 끝에 걸리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런 일이 실제로 발생했는지, 아니면 갑자기 떠오른 환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수중에 열쇠가 없다면 적어도 학교에 있는 것이 분명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다시 한 시간을 걸어서 학교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웬디가 울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꺼이꺼이, 울면서 되돌아 갔다. 학교에는 아직 남아 있는 선생님들이 있었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남아 있는 어린이들도 몇 명 보였다. 웬디는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 책상 주변과 의자부터 살폈다. 아까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처럼 의자에 열쇠가 걸려있지는 않았다. 분명히 가방에서 책을 뺄 때 딸려나왔을텐데, 그래서 떨어졌거나 의자나 책상에 걸렸을텐데, 그런데 없었다. 열쇠는 없었다. 열쇠는 없었다. 

 

웬디는 이미 집에서 학교로 되돌아오는 내내 울었다. 아무도 없는 길에서 울 때는 꺼이꺼이 짐승같은 소리를 내며 울었다. 인간 어린이는 아무래도 짐승에 가까웠다. 웬디는 특히 그랬다. 무엇이 그를 울게 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열쇠를 잃어버려 집에 가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한 슬픔,  걸어온 길을 다시 걸어야 하는 억울함, 열쇠를 잃어버린 자신에 대한 분노, 혹은 이 모든 상황에 혼자 놓인 자신에 대한 연민. 웬디는 자신이 왜 우는지 궁금하지 않았지만, 이유가 있었겠지, 그 울음에. 

 

교실 어디에도 열쇠가 없다는 것을 깨닫자, 울음은 그쳤고, 그는 개운해졌다. 열쇠는 없다. 그 사실이 조금 더 명확해지면서, 이제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것 같았다. 다시 집에 가자. 문 앞 계단에 앉아서 엄마나 아빠가 오기를 기다리자. 애초에 그렇게 했다면 더 좋았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바닥을 뒤지느라 더러워진 무릎을 털며 일어났다. 그레코의 쪽지가 보인 것은 그 때였다. 

 

‘웬디, 비밀의 열쇠를 찾았아. - 그레코’

 

그레코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웬디는 그냥, 빨리 집에 가고 싶었을 뿐이다. 다시 한 시간을 걸어서 집에 도착했을 때,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더 늦지 않게 집에 온 게 다행이군. 웬디는 그런 생각을 하며 현관문 앞 계단에 주저 앉았다. 거기 열쇠가 놓여 있었다. 아까 주머니에 열쇠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가방을 뒤지느라 물걸을 꺼낼 때 함께 딸려나와 열쇠가 굴러 떨어져 계단 참에서 멈추는 모습이 눈 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빗물이 바람에 실려 계단까지 들쳤다. 서둘러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4시였다. 

 

다음 날, 웬디는 몸살이 나서 학교에 가지 못했다. 웬디의 몸 상태와 닮은 날씨였다. 밤새 바람이 불더니 아침부터 비가 거칠게 내렸다. 이런 날씨라면 웬디가 학교에 가는 것도 조금 어려울 뻔했다. 아픈 건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런 날에 혼자 앞산을 지나 뒷산을 넘어야 한다면, 그건 또 다른 울음을 낳았을지도 모른다. 아침 일찍 약을 먹은 게 효과를 보였는지, 열은 가라앉았고 목도 아프지 않았다. 웬디는 아픈 자신을 남겨두고 일을 나간 엄마와 아빠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방 안에 혼자 있다는 사실이 어딘지 신비롭고 즐거웠다. 창 밖으로 빗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좋았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조금 상쾌한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비를 원망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비가 오든, 멈추든, 그 모든 일은 웬디가 관여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레코가 웬디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건 그때였다.

 

*

 

“그레코, 너는 이걸 열어봤어?”

 

웬디가 물었을 때, 그레코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봤다. 그 순간, 너무 많은 걸 알아버린 어린이의 눈이 되었다. 그 눈을 마주친 순간, 웬디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레코는 뭔가를 봐버렸구나. 알아버렸구나. 

 

*

 

그레코는 자신만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집 안의 풍경을 유심히 관찰했다. 이탈리아계 부모의 아들 셋은 모두 얼굴이 달랐다. 첫째는 재혼하기 전에 아빠가 스페인계 여자와 낳은 아들이었고, 둘째는 엄마가 재혼 전에 미국인 전 남편과 낳은 아들이었고, 셋째는 재혼 후 엄마와 아빠가 함께 낳은 아들이었다. 그레코는 재혼 후 엄마와 아빠가 입양한 딸이었다.  당연히 모든 가족이 다르게 생겼지만, 동양인의 피를 온전히 받은 그레코의 얼굴은 완전히 달랐다. 그레코는 케어스쿨에 다니기 시작한 후부터 자신의 진짜 엄마와 진짜 아빠를 찾는 일에 관심을 가졌지만, 온 가족에게는 그것을 비밀로 했다. 그런 것을 말하면 누군가는 상처받는다고 깨달은 어린이였기 때문이다. 

 

열쇠를 손에 쥐자마자, 그레코는 날씨와 시간을 기다렸다. 비가 오고 바람을 방향을 확인하고 4시를 기다렸다. 상자를 열었다. 

/ 수부. 억울하고 분한 눈썹을 하고,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빛깔 좋은 꽃을 키우며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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