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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오늘은 남편의 건강 검진을 받는 데에 따라갔다. 그의 육아 휴직이 끝나간다. 복직을 앞두고 신체검사를 받는 날이다. 대기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고 기다리는 동안 할 일이 없었다. 이 시간에 일이나 할 걸 괜히 왔다는 생각에 화가 난 나는 돌아온 남편을 째려봤다. 괜한 짓이다. 얼마 남지 않은 평일의 시간을 함께 보내면 좋겠다고 함께 생각했으니, 여기에는 누구의 잘못도 없다. 근처에서 맛있는 국수를 사먹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카페에 들어갔는데, 인천 바다가 넓게 펼쳐진 것이 훤히 보이는 테라스가 있었다. 캐롤이 흘러 나왔고 카페에는 우리 둘 뿐이었다. 큰 잔에 담긴 카페라떼는 정성껏 만든 나뭇잎사귀 모양이 무색하지 않게 맛있었다. 종종 화려한 라떼아트에 미치지 못하는 커피 맛에 실망하곤 했으므로 기대까지 낮았던 터라 나의 기분은 긴급하게 좋아졌다. 


행복하다고 말하자 조울증이냐는 비아냥을 들었다. 이건 작업할 때 특히 자주 듣는 말이다. 하지만 슬플 때 슬프다고 말하고 화가 났을 때 화가 났다고 말하고 억울할 때 억울하다고 말하고 행복할 때 행복하다고 말하는 거야. 난 내 순간 순간의 감정에 솔직한 거라고.


하지만 나는 정말로 감정에 솔직한가? 나의 일상을 가장 많이 지배하는 감정이면서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않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나는 행복하다는 감정을 쉽게 느끼는 편이지만 행복해지기 위해서 무언가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오히려 미움 받는 것이 두려워서 조금 더 부지런히 친절하고, 가난해지는 것이 두려워서 열심히 돈을 벌었고, 비난 받는 것이 두려워서 조금 더 꼼꼼하게 살피며 살았다. 그리고 잊혀지는 것이 두려워서 글을 쓰고 나를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행복 같은 건 애초에 나의 지향이 아니었으니, 조금만 행복해도 몇 배로 그 감정을 만끽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행복의 기원은 두려움인가.


두려움이 없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이 긴 시간 내 몸에 찰싹 붙어있었다. 나는 그 무엇을 상상하면서 위로받기도 하고 또 두려워하기도 했다. 두려움이 없다면 할 수 있는 것의 첫 번째는 춤을 추는 것이다. 우습게 보일까봐 두려워서 추지 못했던 춤들을 출 것이다. 다른 것들로는 똑단발로 자르기나 얼마간 아무 말도 하지 않기부터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찾아가 나도 너를 미워한다고 말하기, 수년 전 내게 월급을 주지 않고도 지금 잘 살고 있는 사장에게 전화하기, 또는 정치인이 되어 선량한 사람들을 위한 일이지만 밥그릇 싸움에 밀려난 정책들 추진하기같은 것들이 있었다. 


두려움이 없이 담대한 사람이 늘 부러웠다. 하지만 내가 부러워 하는 사람들은 정말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두려움을 알기에 더 신중하게 용기를 낸 사람들일 것이다. 얼마 전에 이런 이야기들 가운데서 "두려움이 없는 건 너무 무섭지 않나요?"라는 말을 들었다. 지구가 오염되는 게 두렵지 않은 사람들의 환경 파괴, 국민에 대한 두려움을 몰랐던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의 농단,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는 온갖 깡패같은 10대들의 폭력, 두려운 건 돈 뿐인 듯한 기업들이 만든 열악한 근무 환경. 그런 건 두려움이 없는 이들의 결과물이다. 진짜 두려움이 '없는',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들은 오히려 세상을 망쳤다. 


지난 주 내내 두려움이란 단어를 쏙 빼고 두려움에 대해 말했다. 내가 이 주제를 다뤄도 되는지, 잘 못 다룰까봐 걱정된다. 이렇게 이렇게 하고 싶은데 이게 너무 유치하게 보일 것이 걱정이다. 개인으로부터 출발해 전달하는 전개 방식이 주제를 단순화 시킬 것 같아 염려된다. 이 공간이 공연에 집중하는 걸 방해할 것 같아 다른 공간을 찾아봐야 할 지 모르겠다...등등등. 결국에는 쓸모도 의미도 없는 공연을 만들어 사람들의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낭비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누군가에게 예측할 수 없는 형태의 피해를 입히거나 욕을 먹거나 비아냥을 들을까봐 두려운 것이다. 이 두려움이 공연을 만드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어 답답했다. 답답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가 문득 그 말을 떠올린다. "두려움이 없는 게 오히려 너무 무섭지 않나요?" 


내일 부터는 더 잘해야지. 두려움을 안고 다짐을 하며 잠이 든다.



2018.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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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는 제너럴 쿤스트라는 이름으로 참여 예술 작업을 하고 있다. 대부분이 퍼포먼스이고 올해 처음으로 전시 작업을 했다. 모든 작업들이 늘 흥미롭다. 극장이나 미술관이 아닌 일상의 장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관심이 많다. 타고난 예술가는 아니라서 완전히 새로운 것을 어떤 영감을 받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읽으며 공부한다. 그러다보면 마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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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일지 -시작 합니다 나는 머릿 속으로 이것 저것 생각을 하고, 그걸로 작업을 한다. 생각하는 것과 작업하는 것 모두 좋아하는데, 그보다 더 좋아하는 건 글을 쓰는거다. 그래서 공부를 해가지고 논문을 잘 쓰고 싶어는데, 공부도 못하고 논리적인 글도 잘 쓰지 못하더라. 그렇다면 나는 뭘 할 수 있지? 내가 쓰길 좋아하는 글은 뭐지? 내가 가장 꾸준하게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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